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약진 운동 (문단 편집) === 터무니없는 예상치 잡기 === 농업과 공업 생산 부문에서 터무니 없는 수치들이 세간의 이목을 다투면서, 곧 중국의 모든 사람들이 목표량 열풍에 사로잡혔다. 기록적 목표량을 달성했다는 이러한 주장들은 당 모임에서 들먹여지고 강력한 선전 기구에 의해 대대적으로 유포되면서, 최신 기록들 뒤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영예를 안겼다. 중국 최초의 인민공사가 될 [[허난성]] 차야산에서는 1[[헥타르]](= 0.01km²)당 4.2톤의 [[밀]] 수확 목표량이 1958년 2월 설정되었다.[*출처 "마오의 대기근: 중국 참극의 역사1958~1962"] 6천 명의 활동가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포스터와 전단지, 구호, 현수막으로 무장한 채 시골을 돌아다니자 목표치는 한 단계, 또 한 단계 더 높아졌다. 그해 말이 되자, 1헥타르당 37.5톤이라는 완전히 허구적인 목표량이 약속되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허구적이냐면, 세계 최고의 [[농업]] 기술을 자랑하는 21세기 [[미국]]의 밀 생산량이 헥타르당 10.5톤이다. 이것의 3배가 넘는 목표량을 인력만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기록들 다수가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는 데 열심인 현지 당간부들이 과대 선전한 다수확 실험용 [[밭]]에서 달성되었다. 이 밭들은 대체로 집단 농장 중에서 단 몇 뙈기에 불과했지만, 훨씬 넓은 곳에 적용될 영농 신기술의 시연장 역할을 했다. 수확량을 증대시키려는 움직임은 비료 쟁탈전을 조장했다. 바다에서 긁어 온 해초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찌꺼기, 굴뚝에서 긁어낸 검댕에 이르기까지 상상 가능한 모든 종류의 양분이 논밭에 뿌려졌다. 동물과 사람의 분뇨를 밭으로 져 나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밤중까지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광둥성]]의 일부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비료에 보태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공동 식당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토양에 양분을 공급하는 주된 방법은 진흙과 볏짚으로 지은 건물을 허무는 것이었다. 외양간처럼 동물이 살았던, 특히 가축이 방뇨한 건물의 벽은 유용한 비료를 제공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낡은 담과 폐가가 헐렸지만, 증산 운동이 탄력을 받으면서 줄줄이 늘어선 가옥들 전체가 철거되기 시작했다. 흙벽돌이 산산조각 나 들판에 흩뿌려졌다. [[후베이성]] 다볘 산맥 남쪽의 마청에서는 비료를 모으기 위해 가옥 수천 채가 철거되었다. 1958년 1월에 이곳은 후베이성 당서기 왕런중에 의해 1헥타르당 '''쌀 6톤''' 수확을 달성한 모범 현으로 치켜세워졌다.[* 덧붙이자면 '''2021년 [[한국]]'''의 [[https://eiec.kdi.re.kr/policy/materialView.do?num=220084|쌀 수확량은 약 338만 톤이다]]. 그리고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EB001&conn_path=I2|대한민국의 논의 규모는 대략 78만 헥타르]]. 대충 360만/80만으로 나눠야 1헥타르당 4.5톤으로, 대약진 운동 당시에 6톤을 달성했다는 것에서 이미 뻥튀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청에서 배우자!" 인민일보는 열광적으로 부르짖었다. 실험 경작지로 [[마오쩌둥]]의 칭찬을 받자 마청은 성지가 되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그곳에 [[저우언라이]]와 외교부장 천이, 리샨녠을 비롯한 50만 명의 당 간부들이 방문했다. 8월이 되자 1헥타르당 '''쌀 277톤''' 수확이라는 새로운 기록이 달성되었다. 1헥타르가 10,000m²이므로 1평(3.3m²)에 쌀이 91kg이 넘게 나왔다는 소리다. --흙을 수확해도 이것보단 덜 나오겠다-- 선전 기구는 "기적의 시대!"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그해 말이 될 때쯤에는 마청의 건물 5만 채 이상이 파괴되었다.''' 중국 전역의 다른 인민공사들도 너도나도 뒤를 따랐다. [[광둥성]] 다시현, '''"25톤 곡물 대학"과 "5톤 밭"으로 전국적 주목을 받은 한 인민공사에서는 당간부들이 가옥의 절반을 때려부쉈다.''' 다른 유기물들도 결국에는 밭으로 돌아갔다. [[장쑤성]]의 몇몇 지역들에서는 땅이 [[백설탕]]으로 뒤덮였다. 깊이 갈기는 농민들을 토양의 변덕으로부터 해방시킬 또 다른 "혁명적" 처방이었다. "작물을 더 깊이 심을수록 뿌리가 튼튼해지고 줄기도 더 크게 자란다"는 것이, 이런 실험 뒤에 자리한 논리였다.[* [[벼]]는 약 15cm의 깊이로 유지되는 얕은 [[논]]에서 잘 자란다.] "인해전술을 이용해 모든 밭을 갈아엎어라!" 이것이 [[마오쩌둥]]의 명령이었다. 관개사업에서 자갈을 퍼 나르는 게 힘든 일이라면 50cm에서 1m 넘게 - 때로는 3m에 달했다 - 땅을 깊게 가는 것은 완전히 녹초가 되는 일이었다. [[토법고로]]의 터무니없는 목표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멀쩡한 연장들까지 고로에 쏟아넣었는데, 생산된 철이 극심한 저질이라 연장으로 만들 수조차 없으니 남아나는 연장이 없었다. 그래서 연장이 부족한 곳에서는 농민들은 손으로 이랑을 팠고, 때로는 횃불에 의지해 밤이 새도록 땅을 갈았다. 간부들에게 들볶인 마을 주민들은, 때때로 기반암에 닿을 때까지 땅을 파고들어가 표토를 파괴하기도 했다. 1958년 9월이 되자 800만 헥타르의 땅이 대략 30cm 깊이로 갈아엎어졌지만, 지도부는 "적어도 60cm 깊이는 되어야 한다"며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강을 따라 계단식 논밭을 경작하여 비교적 번영을 누리던 [[사천성]]에서는 인민공사 곳곳에서 계단식 논의 80%가 건조한 채소 재배지로 전환되어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의 광적인 추종자, 사천성장 리징취안으로부터 "산을 경사면이 [[밀]]로 뒤덮인 풍요로운 녹지대로 바꾸는 일을 도와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오면서, 농민들은 비옥한 계단식 논밭을 내버리고 몇 마일이나 떨어진 고지대로 가 돌투성이 땅을 골라야 했다. 심지어 인민공사에서 내려온 명령 중에는 수 에이커의 [[옥수수]] 밭에서 잎사귀를 뜯어내는 것도 있었는데, 어느 당 부서기가 "잎사귀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 있다"고 생각한 탓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